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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statement

강 정 민
강 정 민

빛을 조형한다. 이는 그림을 그릴 때 마음에 깃드는 문장이다. 빛은 사물이 시각적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입자이자 파장이다. 화가는 그 빛을 내부로 끌어들여 그림을 그리고 관객은 화가가 다시 내뿜은 빛을 그림을 통해 본다. 옻칠화에서 빛은 더욱 특별하다. 옻칠화가는 빛을 조형하고 그 위에 한 겹의 빛을 덧씌운다. 한 번 더 굴절된 그 빛이 옻칠 고유의 빛이다. 칠흑에서 길어올렸거나 칠흑에 새겼다고 알려진 그 빛이다.

내가 주목한 것이 그 빛이었다. 옻이 드러내는 그 빛은 수묵화의 그것과는 달랐다. 더 깊고 더 단단하고 더 화려했다. 스며들지 않고 여기 있노라고 외쳤다. 그 빛이 드러나는 과정 역시 범상치 않았다. 붓질과 연마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빛은 칠흑을 깨고 반짝거렸다. 그것은 물질의 신비였다.  

그 신비를 깨달으며 인물을 그린다. 그림 속의 인물은 색으로 박피되거나 빛의 자취로 남은 얼굴이다. 존재는 그 껍질과 자취 뒤에 숨어있다. 어떤 순간에도 붙들리지 않는, 암시로서의 존재 말이다. 투명칠에 뒤덮여 불투명한 인물을 햇빛에 노출시켰을 때 그 암시는 개념이 아닌 실재가 된다. 투명칠이 밝아지며 암시된 인물이 빛에 끌리듯이 떠오른다. 칠흑은 그 무엇도 삼킬만큼 깊어진다. 연마를 거치면 인물에 새 빛이 서린다. 그 빛이 얼굴이 두른 또 다른 한 겹이다.

김 미 숙

영국의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브랜들리(Andrew Cecil Bradley)는 아름다움을 다섯 가지 범주로 나누었다.그것은 숭고한(sublime), 웅장한(grand), 아름다운(beautiful), 아치있는(graceful), 예쁜(pretty)으로 인간이 느끼는‘아름답다’라는 쾌감의 강도나 깊이에 따라 다섯 가지 범주의 순위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는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순위이기도 하다.

칸트가 바라보는 아름다움의 기준과 스탕달이 바라보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를 것이며, 플라톤이 바라보는 아름다움과 쇼펜하우어가 바라보는 아름다움의 가치 또한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의 생각이나 가치관, 시대의 환경이나 진리의 변화에 따라 아름다움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나의 작품은 그들의 가치나 생각이 어떠하든 각 낱말의 의미나 순위가 어떠하든 그것은 보는 이들의 생각에 맡겨둔 채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분명하고도 확고한 나의 의지를 담는다.

이 아름다움은 결코 우리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진 욕망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닿기도 어렵지만 결코 영원히 존속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더욱 욕망되어 진다.

우리는 소유하지 못하는 것을 너무도 욕망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는 살아서 반짝이며 빛나는, 누군가 에게는 이미 멀어져 버려 아득한, 누군가는 현실에서 누군가는 미래에서 맞이하게 될 아름다움을 ‘여인과 꽃’으로 형상화하고 어둠과 빛으로 빚어내었다. 잃어버린 자들에겐 그리움이며 현재 누리고 있는 자들에겐 찬란함이고 다가올 미래에 맞을 자들에겐 설렘으로 기다려지는 아름다움이고 싶었다.

 

어둠에서 빛이 탄생하듯 그렇게 어느 시절 ‘여인과 꽃’은 짧은 순간

아름다움이었다가 ‘기억’이라는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산화한다. 어둠에서 빛이 탄생하였듯 그 빛은 또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것은 하나의 진리이며 내가 현재 화종으로 쓰고 있는 옻칠의 특성과도 닮았다.

달빛 한 점 들지 않는 칠(漆)흑과 같은 옻칠캔버스는 어느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 그 자체이다. 빛을 비추어 어두움을 걷어내고 생명을 불어넣어 여인을 빚어내고 한 잎 두 잎 꽃잎을 달아 화려하고 다채로운 이미지의 생명을 창조해 낸다.

작품 속 여인과 꽃은 그 아름다움의 절정일 때 ‘작품’이라는 명제를 달고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박재된 채 멈춰져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옻이라는 화종의 특성처럼 바람에 반응하고 빛에 반응하며, 또한, 따뜻함에 반응하고 차가움에 반응하며, 시시각각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살아간다는 것은 얼핏 채워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잃어가고 멀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꽃과 여인’은 우리의 기억 안에 살아있는 대상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이며 사후적으로 가장 빛났던 내 아름다움에 대한 카타르시스다.

김 정 은

感性色彩  

 

우리는 그 동안 우리가 보이는 그대로를 믿어왔다. 내가 보는 것, 생각하는 것 그리고 배운 것이 전부인양 그렇게 지내왔다.

최근 과학의 발전으로 모든 것은 빠르게 변화해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이성이 지배할 수 없는 영역이 많다. 도덕적인 윤리성도, 개개인의 사고방식도 다양한 개성 표출 방식으로 바뀌어 나가고 있다. 각자가 가진 마음의 자발성과 자율성이 강조되고 개인의 개별성과 개인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본인의 작품에선 그 주된 관심사는 색채에 두었고, 작가 내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른 시각으로, 다른 생각으로 바꿔보려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꽃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되는 화려한 색감들과 생김새... 눈이 아닌 늘 표준화되어 느껴지는 감정들과 색감들이 아닌 감성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오감이 아닌 감성과 느낌으로 전달되어지는 에너지로 색감을 표현하고 싶었다. 꽃에는 각각의 꽃말들로 의미가 부여되어있고, 색상 또한 각 색에 따라 분류되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고유의 매개체들이 만나 작가의 의도에 의해 또 다른 새로운 의미로 표현되어졌다.

감성의 움직임이 개인적 경험이나 환경 조건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색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는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그만큼 색에 대한 반응과 표현은 한 사람의 고유성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시각적인 색채를 감성적 색채 표현으로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화려한 색감 속에 감춰진 절제된 감성들을 그려나갔고, 차가운 색감 안에 내제된 따뜻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너무나 절실히 원하지만 우리를 묶고 있는 틀 안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현실 속의 고통을 캔버스에 쏟아내었고, 행복했던 순간의 감정을 잊고 싶지 않아서 떨림의 감정을 리드믹컬하게 표현하였다. 색은 시각적인 효과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음악적 감각으로 색채음악을 표현할 수도 있다.

꽃이 중심에서 외부로 꽃잎을 펼치듯이 한 곳에서 일어나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에너지를 이미지로 형상화하였다. 어떠한 감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방법으로 사회, 문화, 경험적으로 학습된 색상에 대한 규정된 감각을 전혀 다른 색상으로 표현함으로써 선입견을 넘어선 감성색채를 표현하고자했다.

작품의 꽃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꽃들이 아니다. 꽃이 피어나는 이미지에서 연상되는 펼쳐짐을 시각화한 것으로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을 포착하여 표현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조금씩 천천히 그 틀을 벗어나려한다. 하지만 정답이 없는 정답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해소하고, 또 시작하는 ... 색을 접할 때 어떠한 사고나 논리와 상관없이 즉각적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감성을 표출할 수 있는 그런 일상 속에서의 신선한 충격을 원하고 있다.

꽃이지만 꽃이 아닌 색감의 뭉치 속에서 강열한 감정을 뿜어낸다. 이러한 색감들은 또 하나가 되어 생각과 기억을 깨어나가고 있다.

색채의 마법이라는 말이 쓰인다고 하지만 그 의미는 이미 언어 혹은 과학적으로 해석되고 규정되어 더 이상의 신비는 남아있지 않다. 본인의 작품은 사랑, 환희, 기쁨, 행복의 느낌을 작가 개인적인 색감들로 채워나가며 감정을 색채 안에 전달하고자했다.

 

어떠한 감정들이 느껴졌는지 그리고 그 느낌은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는지 작품을 보는 이들과 같이 공유하고 싶다. 나를 지배하는 나의 생각의 덩어리를 조금씩 바꿔나가고 있다. 지금의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른 길을 열고 싶었다. 감성을 표출하였지만 그것이 이성과는 무관한 또 다른 객체는 아니다. 이성과 감성은 하나로 연결된 끊을 수 없는 고리로 본다. 다만 감성을 이성이 갈 수 없는 다른 문을 열어줄 뿐 이것이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색감과 모양 그리고 사물들의 표준화 되어진 생각의 틀을 깨고 그 안에 감성의 색감들로 가득 채웠다.

주어진 순간을 매 순간 다르게 살고 싶고, 매 순간 다르게 느끼고 싶다. 그리고 그 느낌을 색감으로 전달하고 싶다. 그 색감을 통해 다시 다른 세계를 보고, 다른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

정 광 복

칠(漆)흑에 새긴 빛 – 옻칠화

 

옻칠(国漆)을 주된 재료로 사용하는 옻칠화(漆画)는 전통옻칠공예에 뿌리를 두고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형성한 예술인 동시에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옻칠화라는 명제는 새로운 화종에 대해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옻칠예술가들이 지칭하는 명사임을 인식하고 감상하면 그 매력에 매료된다.

1940년대 베트남의 옻칠화가들은 자국 문화의 역량과 가치를 알리기 위해 순수미술품 형식의 옻칠화를 선보인다. 이를 계기로 민족의 정체성과 고유성이 함축되어 있는 옻칠화 예술운동에 자극을 받은 한국, 중국의 미술가들 역시 옻칠화 예술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적인 회화장르로서 자리매김 하는 초석을 다지게 된다. 서양 문화의 영향으로 민족의 고유성과 정체성이 사라지는 문제는 동양 예술가들에게 있어 중요 관심사였다. 한국에서는 자국의 문화를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 이불, 한복, 고무신, 삿갓 등의 한국적인 소재를 표현한 작품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나에게 있어 옻칠이라는 재료는 한국의 문화를 담아내기 위한 소재이고 옻칠화 예술운동 참여는 저평가된 한국 문화예술을 본연의 모습으로 찾아가기 위한 여정이기도 하다.

나는 옻칠화 작품 창작에 있어 조합, 변형, 개발이라는 조형 능력을 매우 중시한다. 조합과 변형은 재료의 조합, 기법의 조합, 기법 재료의 조합, 기법의 변형을 의미한다. 옻칠화 작품은 다양한 기법과 재료를 사용하는데 조합과 변형이 효과적으로 수반되지 않으면 기법, 재료에서 이질감이 생성된다. 이는 화면 전체의 통일감과 균형을 무너트리는 결과를 도출한다. 효과적인 수반이라 함은 조합 변형이라는 조형 능력의 숙련 정도를 의미한다. 모든 재료에는 두께와 질감의 차이가 있다. 화면에 부착, 고정하는 단순한 과정만으로는 화면을 자연스럽게 구성할 수 없다. 매 재료의 특성에 맞춰 옻칠 질감을 덧 입혀주는 복잡한 제작 과정을 필요로 한다. 옻칠과 함께 사용되는 재료를 조합, 변형하는 조형능력이 숙련되어 있어야만 자유롭게 옻칠화를 창작할 수 있다. 사실적인 표현이 가능한 마회(摩繪)기법은 개발에 속하는 옻칠화의 대표 표현수법으로 다른 회화장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옻칠화 고유의 미(美)를 선사한다. 황갈색의 투명한 코팅막 두께를 매우 미세하게 조절하여 빛의 투과율에 의해 생성되는 명암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색상의 채도, 명도 외에도 투명도라는 조형요소가 가미된 것이다. 옻칠화에서 투명도는 명암 외에도 색상의 느낌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형성을 가진다. 투명도에 의해 나타나는 색상은 중후함과 은은한 느낌의 색감으로 옻칠화 고유의 화풍을 만들어 내는데 중요한 작용을 한다. 이는 기존 회화영역에서는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빛을 표현하는 옻칠화 고유의 표현 방법인 것이다.

조합, 변형, 개발은 옻칠화의 표현 형식에 대한 내용을 의미한다면 계승, 발전, 창신(創新)은 예술적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제 1차 세계대전 시기 사회의 불안성에서 출발한 서양의 전위예술운동은 기존의 예술을 부정하고 파괴를 통한 창조 정신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과거 전통 옻칠문화예술을 계승하여 조합, 변형, 개발이라는 표현형식 원리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긍정, 구축 정신을 예술관으로 삼고 있다.

옻칠화 작품 창작 시 얇게 가공 된 나무를 즐겨 사용한다. 옻칠화 판에 나무를 부착하고 나무 표면위에 옻칠을 하여 실제 문, 창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 마치 실제 오브제 안에 그림이 담겨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실존과 허구의 상반되는 느낌을 선사한다. 또한 구상과 추상, 정형화된 도형의 형상과 비정형의 형상과 같이 대립 상반되는 조형요소들로 화면을 구성한다. 단순화된 블라인드 형상과 창문 형상 역시 안과 밖, 개방과 폐쇄라는 상반되는 의미를 가진 구성요소로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느낌의 상반되는 조형요소들은 조합, 변형, 개발이라는 조형원리에 의해 새로우면서도 독특한 화풍으로 구축되는 것이다.

작품 내에는 크고 작은 창을 의미하는 사각 프레임이 등장하는데 이는 앞서 기술한 옻칠화의 문화 예술적 가치의 내용을 크고 작은 창을 통해 창 밖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외침을 뜻한다. 개개인의 창을 통해 들려오는 작가의 외침에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을 활짝 열어 옻칠화의 진정한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각프레임은 소통의 창이라는 의미 외에도 작가 개인에게 있어 소통의 흔적이 남아있는 팔레트를 의미한다.

‘칠흑과 같은 어두움’에서 칠흑은 흑칠(黑漆 - 검은색 옻칠)에서 유래되었다. 흑칠은 그 어떤 흑색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한 줄기의 빛도 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두움에 가려진 옻칠화 캔버스에 빛을 비춰 세상을 밝히는 옻칠화를 ‘칠(漆)흑에 새긴 빛’이라 한다. 새하얀 여백은 안개가 되고 안개를 붓으로 걷어내 안개 속의 이미지를 드러나게 하는 수묵화 예술론과 마찬가지로 흑, 백의 차이만 있을 뿐 동양사상이 깃들어 있는 진정한 동양의 화종임을 소통의 창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